철학하기

우경화된 청년세대를 바라보며

이번생 2026. 6. 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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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된 청년세대를 바라보며


공정의 꿈은 왜 분노의 언어로 변했는가


대한민국 사회는 오랫동안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더 개방적이고 진보적일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산업화 세대가 경제 발전을 이끌었고 민주화 세대가 정치적 자유를 확장했다면, 그 다음 세대는 더욱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많은 사람들은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20~30대 남성들 가운데 일부가 강한 보수 성향을 보이거나 극우적이라고 평가받는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젊은 세대가 진보 진영의 핵심 지지층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오히려 보수 진영이 청년층을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걱정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실망합니다. 하지만 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왜 저렇게 되었는가?”


이 질문 없이 “저들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세대



지금의 20~30대 남성들은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경쟁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일지 모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경쟁에 뛰어들었고, 대학 입학 후에는 취업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취업을 해도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부모 세대는 가난했지만 희망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었고,
아이를 키울 수 있었으며,
중산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은 다릅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대학을 나와도,
대기업에 취업해도,


서울의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결혼은 사치처럼 느껴지고,
출산은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부릅니다.


절대적으로 가난해서가 아니라,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들의 분노가 시작됩니다.



공정이라는 새로운 신앙



과거 세대에게 중요한 가치는 민주화였습니다.


독재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민주화가 아닙니다.

공정입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경쟁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시험 점수,
내신 등급,
수능 성적,
토익 점수,
자격증 개수.

모든 것이 숫자로 평가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년들은 하나의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규칙만 공정하다면 결과는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정치권은 수많은 특혜 논란에 휩싸였고,
사회 곳곳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사례들이 반복되었습니다.

특히 조국 사태는 많은 청년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자녀에게 특권을 제공했다는 의혹은 청년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청년들은 기존 진보 진영을 더 이상 정의의 상징으로 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윤석열이라는 상징



윤석열은 바로 그런 시대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검사였습니다.

그것도 권력에 맞서는 검사라는 이미지로 알려졌습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은 당시 청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윤석열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상징이 되었습니다.

공정의 상징.

상식의 상징.

기득권에 맞서는 인물의 상징.

그 결과 그는 검찰총장에서 대통령까지 올라가는 정치적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늘 인간의 기대를 배반합니다.



계엄이라는 충격



윤석열 정부 말기에 벌어진 비상계엄 논란은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 병력이 정치 문제 해결 과정에 등장하는 장면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민감한 의미를 가집니다.

국회 주변에 군 병력이 배치되고,
특전사가 움직이며,
헬기가 동원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 군사정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가능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일부 청년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계엄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을 다시 지지하는 “윤 어게인” 구호까지 등장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게임화된 정치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속에서 성장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유튜브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의견을 형성하며,
게임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게임 자체가 문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게임은 훌륭한 문화 콘텐츠입니다.

문제는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게임 속 세계는 단순합니다.

적과 아군이 있습니다.

승리와 패배가 있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합니다.

상대를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면 끝입니다.

그런데 정치가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야당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 적군이 됩니다.

국회는 토론의 공간이 아니라 점령해야 할 성이 됩니다.

정치는 민주적 과정이 아니라 전쟁이 됩니다.



알고리즘이 만든 세계



유튜브와 SNS는 사용자가 좋아하는 정보만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한 번 특정 정치 영상을 보면,
비슷한 영상이 끝없이 추천됩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과 같은 생각만 접하게 됩니다.

이를 에코 챔버(Echo Chamber)라고 부릅니다.

메아리처럼 같은 목소리만 들리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서는 비판이 사라집니다.

반론이 사라집니다.

현실 검증도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확신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 민주주의 위기를 보면서도

“이건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었다.”

라고 믿게 됩니다.



분노는 왜 극단을 선택하는가



희망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진 사람은 적을 찾기 시작합니다.

청년들의 분노는 실제입니다.

집을 살 수 없다는 분노.

결혼할 수 없다는 분노.

노력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분노.

문제는 그 분노가 해결책을 찾기보다 적을 찾는 방향으로 흐를 때입니다.

그때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쟁이 됩니다.

상대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극단주의는 시작됩니다.



청년을 비난하기 전에


우경화된 청년세대를 바라보며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난이 아닙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동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청년들의 좌절을 외면한 채 극단주의만 비난한다면 문제는 반복될 것입니다.

청년들은 원래 극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공정을 원했습니다.

상식을 원했습니다.

미래를 원했습니다.

다만 그 꿈이 좌절되면서 분노가 되었고,
그 분노가 정치적 극단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청년들의 우경화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짜 위기는 청년들이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희망보다 분노를 선택합니다.

분노는 언제나 단순한 답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답답하고,
타협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제도인 이유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경화된 청년세대를 바라보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그들이 분노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청년들에게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세대는 극단으로 가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진 세대는 미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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