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이후에 남은 것 —김 현경에 관한 기록

침묵 이후에 남은 것 — 김 현경에 관한 기록
김현경은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깼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웃의 발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그를 신경이 곤두서 있는 사람이라 불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깨어 있음에 가까웠다는 것을. 그는 세상이 발산하는 미세한 거짓과 불일치를 감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숲속에서 풀을 뜯다 고개를 들어 바람의 방향을 읽는 사슴처럼, 그는 늘 세계의 기척을 먼저 느끼는 쪽에 가까웠다.
20대의 현경은 신앙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고, 교회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예배는 그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 있었고, 기도는 습관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다.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라 감사의 언어였고, 그는 기꺼이 그 언어를 반복했다. 하나님은 정의롭다고 그는 믿었다. 세상이 불공평해 보일수록, 하나님은 그 너머에서 모든 것을 바로잡고 계실 것이라 확신했다. 정의는 늦어질 수 있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믿음은 언제나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장면에서 흔들린다. 어느 날 우연히 교회의 재정 보고서를 들여다본 순간, 그는 숫자들 사이에서 설명되지 않는 침묵을 발견했다.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책정된 예산은 늘 계획에만 머물렀고, 실제 집행은 계속 미뤄졌다. 반면 교회 내부를 위한 비용은 정확했고, 신속했으며, 정당화되어 있었다. 그는 분노하기보다 혼란스러웠다. 사랑을 말하는 언어와 사랑을 사용하는 방식 사이의 괴리가 그를 오래 붙잡았다.
그날 이후, 그의 질문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역사로 향했다. 밤마다 그는 전쟁과 학살의 기록을 읽었다. 특히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록은 그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하던 시간 동안, 하늘은 침묵했다. 아이들이 가스실로 끌려가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덮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의로운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의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기대어 살아온 세계의 기둥을 흔드는 질문이었다. 만약 하나님이 정의롭다면, 그 정의는 언제 작동하는가. 죽은 뒤에야 완성되는 정의는 살아 있는 동안의 절망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후의 심판이 현재의 학살과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는 점점 “하나님은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했다.
교회에서 그의 질문은 환영받지 못했다. 질문은 곧 불신으로 오해되었고, 의문은 신앙의 연약함으로 해석되었다. 그는 점점 ‘불편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 무렵 그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신앙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화된 신앙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말하는 “사로잡힌 영혼”이란 질문하지 않는 믿음, 조건화된 구원, 천국을 보상으로 삼는 거래적 신앙, 예수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하는 태도였다. 그는 그런 신앙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교회를 떠나며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예수의 사랑만 취하겠다. 천국이라는 보상은 원하지 않겠다.”
그 말은 불신앙의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급진적인 신앙 고백이었다. 그는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남기고 싶어 했다. 보상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세계를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신앙을 떠난 이후, 그의 삶은 조용해졌지만 질문은 더 깊어졌다. 그는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더 이상 그의 질문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불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낯설지 않은 사유를 발견했다. 집착이 고통을 낳고, 집착을 놓는 것이 해탈이라는 가르침은 그의 내면에서 오래 울렸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신앙에서 느꼈던 불편함은, 어쩌면 지나치게 사후 세계에 집착한 구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태도에 가까웠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방식. 그는 점점 죽음과 사후 세계를 초월한 관점으로 이동했다. 천국을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아니라, 사후의 보상 없이도 지금 이 순간을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 그는 그 방향이 오히려 예수가 말한 사랑과 더 가깝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오직 하나의 길만이 구원이라는 주장, 다른 믿음을 ‘어둠’이나 ‘미혹’으로 규정하는 태도. 그는 묻게 되었다. 사랑을 중심에 둔 종교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배제와 단절을 정당화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창조주라면, 왜 하나님을 향한 길은 단 하나만 허락되는가. 그는 점점 기독교가 신앙이라기보다 체계화된 정체성 정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당직을 서던 밤에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잠을 아끼며 두세 권의 동화를 써 내려갔다. 동화는 그에게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였다. 교리가 아닌 이야기, 명령이 아닌 은유, 심판이 아닌 선택, 설교가 아닌 질문. 그는 더 이상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어두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가 썼을 법한 동화 중 하나는 이런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느 마을에 매일 종을 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종이 울리면 모여들었고, 종이 울리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종은 마을의 중심이었고, 종을 치는 사람은 그 중심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묻는다. “왜 종을 치나요?” 종을 치던 사람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할까 봐 종을 쳤을 뿐이었다.
그 동화에서 종은 종교이자 제도였고, 의무화된 신앙의 상징이었다. 종은 사람들을 모으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종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 울려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종은 사람을 깨우는 대신 묶고 있었다. 그는 그 종을 더 이상 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은 분명했다. 구원이 조건이 아닌 관계인 세상, 사랑이 보상의 수단이 되지 않는 세상, 선행이 기록되지 않아도 의미 있는 세상, 신의 이름이 인간의 탐욕과 배타성을 정당화하지 않는 세상. 그는 천국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천국을 거래 대상으로 만드는 인간을 거부했을 뿐이었다.
김현경이 끝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아도,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는 종이 울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선하고, 신의 이름이 없어도 약자가 보호받으며, 구원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떠하든,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윤리를 대신하지 않는 세계.
사람들은 그를 신앙을 잃은 사람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값싼 구원과 값싼 정의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인간마저 침묵한다면, 그 침묵은 악이 된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었고, 그의 이탈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가 울리지 않은 종은 여전히 울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질문이 태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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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이후에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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