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기

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저버리다

이번생 2025. 7. 2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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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저버리다 ― 기독교와 정치, 구원과 해방의 언어를 다시 묻다

1. 신의 이름으로 정치는 무엇이 되었는가



   오늘날 정치의 언어는 혐오와 분열의 수단으로 타락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브라질에서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이러한 정치적 타락에 깊숙이 관여하며, 신앙의 언어를 극우적 권력의 정당화 장치로 내어주었다. 신은 누구의 편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을 위한 도구인가? 이제 우리는 이 근본적인 질문들 앞에서, 신학적 침묵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으로 응답해야 한다.



2. 정치화된 신앙: ‘믿음’의 왜곡



   기독교 신앙은 본래 약자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현대 복음주의는 그 시선을 권력자에게로 돌려버렸다. 한국의 경우, 전광훈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특정 정당을 신격화하고, 김진홍·김장환 목사 등은 보수 정권과의 친밀한 동맹을 통해 복음의 언어를 정치적 수사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신학의 파산이며, 복음의 윤리적 배반이다.


   브라질 역시 마찬가지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복음주의 교단의 전폭적 지지를 업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2023년 1월에는 극우 군중이 의사당을 점거하며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 장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브라질 국기와 함께 흔들리던 십자가였다. 기독교는 언제부터 권력을 향한 무기였는가?



3. 역사 해석권의 전쟁: 전한길의 사례


  
   한국의 역사 강사 전한길은 이 전환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한때 공무원 수험생들에게 인기를 끌던 그는,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신앙을 고백한 뒤 더 이상 교육자가 아닌, 역사 해석의 극우 전사가 되었다.


   그의 강연은 이제 산업화 신화, 식민지 근대화론,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정치적 주장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재포장된 신정사관이며, 이 땅의 민주주의와 시민 주권을 마비시키는 영적 억압이다.



4. 정치와 신학,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정치와 신학은 결코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예수는 정치적 죽음을 맞았고, 그의 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해방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는 너무 쉽게 권력과 타협하고, ‘순종’과 ‘질서’를 내세워 시민의 저항을 봉쇄한다.


   진짜 기독교는 체제를 신성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는 체제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의 언어는 어떻게 다시 구원과 해방의 언어로 재창조될 수 있는가?

    
   정치는 다시 고통의 언어를 말해야 한다. 억압받는 자의 침묵 속에서 말문을 열어야 하며,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공존의 윤리, 회개의 담론, 연대의 문법을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을 권력의 방패로 사용하지 않는 길에서만 가능하다.



5. 새로운 실천: 기도보다 절박한 민주주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믿음의 회복이 아니다. 우리는 저항의 신학, 해방의 윤리, 시민 주권을 회복하는 철학적 상상력을 다시 길어 올려야 한다.


   민주주의는 기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기도는 방향이 될 수 있지만, 실천 없는 기도는 곧 침묵이며, 침묵은 곧 공모다. 신의 이름은 더 이상 권력의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억눌린 자의 자리에서 울려 퍼져야 한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믿음은 두 손을 모아 하늘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받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일어서려는 몸의 언어로 살아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6. 다시 시작하는 언어


    정치는 다시 공동체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신앙은 다시 이웃의 고통을 듣는 귀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다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상상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너무도 자주 쓰였다. 이제는 “사람의 뜻”, “공동체의 뜻”, “함께 사는 정의로운 질서”를 말할 차례다.


   진짜 구원은 종교적 말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두려움 없는 시민, 억압에 저항하는 신앙, 침묵하지 않는 철학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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