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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흔들리는 인간을 위해 법이 어떻게 손을 내미는가”

by 이번생 2026.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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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인간을 위해 법이 어떻게 손을 내미는가”

사람은 누구나 강한 순간보다 약한 순간이 더 많습니다. 그 약함을 감추려 애쓰며 살아가지만, 결국 삶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언제까지 혼자 모든 판단을 책임질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우리를 떠올려보면 그 답이 명확해집니다. 한 아이가 자전거를 몰고 동네를 누비다가, 어느 날엔 그 자전거를 누군가에게 팔겠다고 나섭니다. 시세를 잘 몰라 헐값에 넘겨버릴 수도 있고, 거래의 이면을 파악하지 못해 손해를 보기 쉽습니다. 17세, 16세, 15세… 이 나이에 우리가 인생의 거래라는 복잡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성년자의 법률행위에는 언제나 “다시 생각할 기회”, 즉 취소라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법의 보호는 ‘부정’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보호는 아이를 어른의 세계 밖에 가두는 벽이 아니라, 그 세계로 들어가기 전 잠시 손을 잡아주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미성년자가 어떤 거래를 했더라도 아이가 원한다면, 혹은 법정대리인이 판단한다면 그 거래는 취소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취소는 아이에게만 열려 있는 문이 아닙니다. 상대방도 보호받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보호가 상대방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그 계약을 유지할 건지 말 건지, 답해달라”고 법정대리인에게 촉구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에게 직접 촉구할 수는 없습니다. 미성년자는 아직 세계와 거래를 온전히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촉구’라는 조심스러운 요청조차, 법은 훅 들어가지 않고 아주 정중하게, 법정대리인을 향해 보내라고 합니다.  “미성년자에게 촉구할 수 있는가?” “촉구 기간 내에 법정대리인이 답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모든 답은, 결국 여기서 출발합니다. 보호와 책임의 균형.


그런데 이 아이가 만약 혼인을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흥미롭게도 법은 미성년자가 혼인을 한 순간, 그 아이를 성년으로 봅니다. 나이는 그대로인데, 책임의 무게가 달라져 보호의 방식도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혼인만 하면 성인 취급’이라는 행정적 표현이 아닙니다. 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가정을 꾸리기로 했다면,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어른으로 대하겠다.”

이 지점에서 법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섬세합니다. 나이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선택이 때로는 나이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성년자가 ‘속임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성년자로 꾸미고 계약을 했다면 그 보호는 사라집니다. ‘단순히 성년이라고 말한 정도’가 아니라, 서류를 위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능력자를 가장해 상대방의 판단을 왜곡시킨 경우, 법은 “그건 보호의 범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보호란 필요할 때 제공되지만, 악용되지 않도록 엄격히 지켜지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법은 일상생활의 영역을 특별히 분리합니다. 미성년자라도 일용품을 사는 행위는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움직임’으로 보고, 그런 행위는 취소할 수 없도록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일상을 기반으로 살아갑니다. 그 일상을 지나치게 묶어놓는 것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삶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 되니까요.


그러나 조금만 성장하면, 혹은 부모의 허락이 있다면 미성년자라도 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특정한 영업을 허락하면 그 영업 범위에서는 미성년자도 성년자와 똑같습니다. 부모조차 그 영업행위에 대한 대리권이 없습니다. 아이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그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존중됩니다. 이것이 ‘특정한 영업행위는 단독으로 가능하다’는 조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아이의 성숙을 믿고 내준 자율성은 그만큼 아이의 책임을 존중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 우리 자신 역시 판단력이 무뎌질 때가 있습니다. 노쇠함이 찾아오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세상은 점점 빠르게 달려갑니다.

  
이때 법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손을 잡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년후견제도입니다. 성년후견이 개시될 때 법원은 반드시 본인의 의사를 고려합니다. 이 규정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남아 있는 판단력과 존엄을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아무리 보호가 필요해도, 누군가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결정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년후견인이 선임되면 피성년후견인의 법률행위 중 일부는 후견인의 동의 없으면 취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구매는 언제나 유효합니다. 희미해진 판단력 속에서도 일상을 꾸려가는 작은 선택만큼은 누구에게나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법은 책임도 놓지 않습니다. 피성년후견인이 속임수를 써서 자신을 능력자로 믿게 했다면 그 행위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만든 속임을 감싸줄 수는 없습니다.


한정후견제도는 그보다 더 가벼운 보호입니다. 사무 처리 능력이 일부 부족한 사람에게 적용되며, 어떤 행위에 동의를 요할지는 법원이 정합니다. 예컨대 “재산 처분은 어렵지만 일상적인 소비는 잘한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동의의 범위는 그 사람의 실제 능력에 맞게 조정됩니다.


특정후견은 그보다도 더 가벼워서 특정한 사무에 대해서만 일시적 후원이 필요할 때 개시됩니다. 특정후견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능력이 전혀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특정후견인은 취소권도 없고 단지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법원은 특정후견을 개시할 때 반드시 그 사무의 범위나 기간을 정해야 합니다. 삶의 필요한 부분을 잠시 도와주는 것— 그것이 특정후견의 본질입니다.


이 모든 보호가 존재하는 동안에도 법은 또 다른 한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제한능력자와 거래하는 ‘상대방’입니다. 그가 불필요하게 큰 위험을 떠안지 않도록 법은 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줍니다. 제한능력자임을 알았거나 몰랐거나 언제든 의사표시를 철회하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균형’이라는 법의 미학입니다. 한쪽의 약함을 보호하되 다른 쪽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그래서  “제한능력자임을 알았다면 철회할 수 없다” 고 합니다.


계약이 취소되면 원상회복의 문제가 따라옵니다. 제한능력자가 선의였다면 남아 있는 이익만큼 반환하면 됩니다. 그러나 악의였다면 받은 이익 전부를 반환해야 합니다. 보호를 ‘피난처’가 아닌 ‘무기’로 쓰려는 시도는 법이 가장 단호히 거부하는 영역입니다.


이렇게 제한능력자 제도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법은 결국, “언제나 약해질 수 있는 존재인 인간” 를 위한 것이며, 그 약함을 절대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는 ‘미완성의 시기’를 인정하며 실수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어른에게는 ‘책임진 선택’을 요구합니다. 노인에게는 ‘존엄을 해치지 않는 보호’를 제공합니다. 잠시 판단력이 흐려진 자에게는 ‘잠깐 기대어도 되는 작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희생되지 않도록 상대방까지 조용히 보호합니다.


이것이 제한능력자 제도라는 이름 아래 법이 세상에 펼쳐놓은 따뜻한 질서입니다. 그 질서는 단순히 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규정의 집합이 아니라, 사람의 생애 전체에 걸쳐 공존하는 보호와 책임의 균형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법은 인간의 약함을 비난하지 않고, 그 약함을 품으며, 책임을 잊지 않도록 조용히 손을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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