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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철학: 앎을 넘어 존재하는 삶에 대하여

by 이번생 2025.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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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철학: 앎을 넘어 존재하는 삶에 대하여


1. 앎은 삶을 완전히 포착할 수 있는가?


   “인간은 앎을 통해 해방될 수 있는가?” 라는 계몽주의의 오래된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이해하고자 하고, 설명하고자 하며, 투명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역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완전히 알려진 삶은, 이미 죽은 삶이라는 점이다.


   앎은 대상의 구조를 밝히지만, 삶은 구조 이상으로 불확정적이고 모순적이며 자생적인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흔들리고, 불완전하며, 자기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하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있는 것의 깊이와 떨림을 제거하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2. 무지란 무엇인가: 니체의 경구에서 시작하여

니체는 후기 사유에서 ‘새로운 계몽’(die neue Aufklärung)의 이름으로 무지를 새로운 긍정의 대상으로 재사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과 동물이 어떤 무지 안에서 사는지 통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무지를 향한 의지를 배우고 품어야 한다. 이런 유형의 무지가 없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할 터라는 점, 이 유형의 무지는 살아 있는 놈이 존속하고 번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크고 단단한 무지의 종이 너를 둘러싸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부근 사유에서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무지는 단순한 결핍이나 무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전부 해명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둔 여백, 설명될 수 없는 생의 비의(祕儀)이며, 존재가 존속하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이다.



3. 무지와 무위: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부재의 형식


   무지는 다름 아니라 무위(無爲)의 한 형식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고, 조절하지 않고, 도달하려 하지 않는 존재 방식을 뜻한다.

   삶은 무위의 순간에서 생동한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설명하지 않는 사랑, 계산하지 않는 슬픔, 이해할 수 없는 감동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기계로 환원된다. 모든 감정은 알고리즘화되고, 모든 행위는 목적화되며, 존재는 메커니즘으로 전락한다.


니체는 이러한 세계에 저항한다. 그는 묻는다:

“왜 살아 있는 존재는 자신을 완전히 알지 않으며, 완전히 통제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는 아직 살아 있다.”



4. 앎의 의지와 생의 마비


   현대 사회는 지식과 정보, 데이터로 넘쳐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알고자 하고, 의심 없이 명료해지려 한다.

   그러나 그 앎은 종종 삶의 질감을 제거하고, 존재의 깊이를 말소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결국 모든 것을 불신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열림을 닫고, 가능성을 차단하며, 삶을 정태적인 사물로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무지에 대한 의지는, 존재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의 윤리를 뜻한다. 무지는 비록 모른다는 것이지만, 그 모름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존재의 비의를 감각할 수 있다.



5. 결론: 무지를 긍정하라


   무지는 무능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조건이자, 존재의 내재적 여백이다. 무지를 긍정하는 것은 앎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앎만으로 구성되지 않음을 아는 태도, 삶을 덜 설명하고 더 감각하려는 태도이다.

니체는 말한다:

“단단한 무지의 종이가 너를 둘러싸야 한다.”

   그 종이는 어쩌면 삶이 보호받는 마지막 경계이자,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불확실하고도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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