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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국가를 파괴하다 — 브라질 복음주의와 극우 정치의 교착

by 이번생 2025.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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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이름으로 국가를 파괴하다 — 브라질 복음주의와 극우 정치의 교착


   2023년 1월,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의 대통령궁과 대법원, 의회가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손에 점거되었다. 그 장면은 미국의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구조는 다소 달랐다. 이 쿠데타 시도의 중심에는 종교, 그것도 복음주의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 정치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고, 기도는 헌법을 압도하는 상징으로 동원되었다.


   좌파 철학자로서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종교적 열광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브라질 사회의 특정 계층,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에 내몰린 하층민의 불안과 갈등이 종교라는 형태를 통해 정치적으로 재구성된 결과였다. 복음주의는 브라질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하고, 그 모순을 타자에 대한 증오와 음모론으로 치환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 그람시와 ‘문화전선’으로서의 교회

   안토니오 그람시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교회가 가진 ‘헤게모니의 중개자’ 역할을 통찰했다. 그는 지배계급이 단지 군사력이나 자본력만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관념과 도덕, 상식의 구조를 점유함으로써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끌어낸다고 보았다. 브라질 복음주의는 이 지점을 너무나도 정확히 구현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단순한 신앙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층민의 욕망과 불안을 조직하는 문화기계이며, 보수적 가족주의·성윤리·기독교적 국가주의를 통해 극우 정치의 정서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이 교회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넘어서, ‘가난은 네 믿음이 약해서’라는 식의 자기책임화 담론을 내면화시킨다.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대신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 같은 허구적 적을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라, 억압적 권력을 내면화시키는 정치장치다.


⛪ 복음주의 교회의 정체: ‘영적 네오파시즘’


   복음주의는 오늘날의 브라질에서 단순한 종교 세력이 아니라, ‘영적 네오파시즘(spiritual neofascism)’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시키며, 불안을 구원의 약속으로 교환한다. 질 들뢰즈가 말한 ‘욕망의 체계’가 정치의 형식이 된 것이다.


   보우소나루 정권이 교회에 기댄 것은 단순한 선거 전략이 아니다. 그 정권은 교회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폭력을 영적인 것으로 전환하고, 그 전환을 통해 통치했다. 복음주의 교회는 실업자에게 ‘믿음을 가지면 직장이 생긴다’고 말하고, 코로나 사망자 유가족에게 ‘하느님의 뜻’이라 위로하며 국가의 무능을 씻어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신성화이며, 신의 이름을 빌린 폭력의 제도화다.


🧨 쿠데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비정치적 정치


   2023년 1월의 쿠데타 시도는 단지 선거 불복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유로 한, 헌정질서의 파괴였다. 성경을 들고 의회 계단을 오르는 군중들, 대형 교회에서 “군이 개입해야 한다”고 기도하는 목사들, “룰라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메시지를 나르는 유튜브 설교자들.


   여기에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비상사태는 예외가 아니라 규범이 되었다”는 선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이 비상사태의 연출자가 되었다. 평소에는 권력의 길잡이로서, 위기에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폭력의 촉매로서 기능했다.


   이것은 종교적 열정이 정치화된 것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가 종교의 언어로 재정의된 사례다. 정치의 종말이 아니라, 정치의 신화화, 더 나아가 폭력의 합리화다.



🧭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


   브라질의 좌파는 오랫동안 종교를 “미신”이나 “후진성”으로 간주하며, 그것과의 적극적인 접촉을 회피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면, 좌파의 종교 포기 전략은 근본적으로 실패했다. 교회는 단지 종교가 아니라 삶의 공동체, 사회적 안전망, 정서적 해석체계로 기능하며, 자본주의적 고통의 파편을 수거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정치적 영성’과 ‘세속적 윤리’의 재구성이라는 과제 앞에 서 있다. 비정상적인 교회를 해체할 수 없다면, 교회에 대항하는 대안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치의 언어는 어떻게 다시 구원과 해방의 언어로 재창조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지 브라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은 더 이상 하늘에 있지 않다. 그는 유튜브 알고리즘과 가짜뉴스 서버에 거주하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디지털 예배당에서 통치한다.



✒️ 복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종교는 한때 위로였고, 공동체였으며, 저항의 언어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억압의 가면을 쓴 동원 기계가 되었다. 복음주의와 결탁한 극우는 단지 권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해석 자체를 독점하려 한다.


   따라서 싸움은 선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두고 벌이는 전쟁이며, 해석의 전쟁이고, 감정의 전쟁이다. 진보는 다시금 공동체를 말해야 하며, 해방의 신학을 부활시켜야 한다. 정치와 영성을 재결합하되, 그것은 폭력이 아닌 해방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민중의 철학’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신의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다 — 대한민국 극우 종교의 정치화와 민주주의의 퇴행


1. 정치가 된 종교, 신이 된 권력


   대한민국에서 종교가 정치에 개입한 역사는 결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단순한 개입을 넘어서, 정치의 신성화이자 민주주의 원칙의 파괴다. 한국의 복음주의권 일부 목회자들은 더 이상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권력을 축복하고 옹호하며, 그 권력의 폭력성조차 신의 이름으로 감싼다.


   김장환, 김진홍, 전광훈, 전한길 등은 모두 이 ‘극우 신정정치’의 중심 인물들이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를 “하나님의 뜻”이라며 축복하고, 선거에서의 승리와 검찰 권력을 종교적 섭리로 정당화한다. 문제는 그들이 단지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명분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법과 헌법, 그리고 시민들의 의사를 대체하는 ‘하나님의 뜻’ 담론을 정치적 통치 도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 전광훈과 ‘기독파시즘’의 민낯


   전광훈은 말할 것도 없이 이 극우 종교-정치 연합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반복하며 반헌법적 선동을 일삼았고, 2020년 코로나19 대확산 시기에도 방역을 거부하며 광화문 집회를 강행했다. 그의 집회는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노골적인 극우 정치 집회이며, 교회는 사실상 정당의 선전 도구로 전락했다.


   전광훈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운 나라”라는 논리는 정치적 이성의 부정이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선택사항이며, 신정(神政)은 대안 체제다. 여기서 우리는 위험한 유사성을 본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미국의 트럼프 지지 복음주의자들이 저질렀던 반민주적 쿠데타 시도와 그 기저의 ‘신의 권위’를 빌린 정치 폭력이 한국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3. 김장환·김진홍: ‘경건한 기득권’의 정치


   김장환 목사는 1970년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보수 권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윤석열의 대선 캠프에 일정한 상징성과 정당성을 부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김장환은 정치적 선언을 자제하는 듯하면서도, 극우적 보수담론의 이념적 후원자로 작용한다.


   김진홍 목사 또한 ‘뉴라이트’ 담론의 대표적 전달자다. 그는 반공주의와 경제성장을 기독교적 사명으로 포장하며, 자유시장주의를 ‘성서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가난과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에 눈감게 하고, 모든 실패와 고통을 개인의 신앙과 도덕성으로 돌리게 만든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상징을 통해, 국가 폭력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즉,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권위주의의 귀환을 ‘구속력 없는 믿음’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4. 전한길: 역사 해석권의 전쟁


   전한길은 한때 수험생들 사이에서 신뢰받던 한국사 강사였다. 그는 비교적 정제된 강의 스타일과 교과서 기반 해석으로 입지를 쌓았고, 수많은 공시생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니엘 기도회에 강사로 참여하며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뒤, 강사직을 내려놓고 극우 정치 담론의 확성기로 전환한 것이다.


   그의 유튜브 채널과 강연에서 반복되는 발언은 더 이상 역사 교육이 아니다. 그는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일제 식민지배를 “불가피한 근대화 과정”으로 미화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언급할 때조차 그 진실을 흐리는 태도를 취한다. 이 모든 발언은 단순한 ‘보수적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역사 왜곡이자, 반민주주의적 기억투쟁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 왜곡된 역사 해석이 기독교 신앙의 서사와 결합되면서, 역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정사관의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워진 구원의 정권”으로 포장하는 그의 메시지는, 정권을 비판하는 행위를 곧 신에 대한 반역으로 연결시킨다. 이는 민주주의에서 핵심 가치인 비판과 숙고, 다원성과 시민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전한길은 더 이상 교육자가 아니다. 그는 역사 해석의 전쟁터에 뛰어든 문화전사이며, 그가 말하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 목적에 맞게 재조립된 서사다. 그의 메시지는 지식의 공유가 아니라 이념의 주입, 비판의 중지, 역사의 신앙화에 가깝다.


   그의 강연에는 더 이상 학문도, 성찰도 없다. 오직 선악의 이분법, ‘좌파=악’이라는 단선적 논리, 그리고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배타적 선민주의만이 남아 있다. 그는 역사를 통해 시민을 깨우치기보다는, 신앙을 빌어 복종을 주입하고, 극우 정치 담론의 신학적 뒷배를 만들어 주는 자리에 서 있다.


5. 윤석열과 극우 종교의 유착: 내란적 구조


   얼마전 닻을 내린 윤석열 정권은 검찰독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헌법과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시하며, 권력기관을 동원한 정치 보복과 선동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종교적 정당성이 부여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 검찰은 정의의 도구 → 하나님의 심판
• 문재인 정부는 악마화 → 사탄의 통치
• 윤석열은 사명자 → 신의 뜻을 이행하는 자


   이 같은 프레임은 단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대체하려는 신정정치적 시도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국민은 ‘시민’이 아니라 ‘신자’가 되고, 정치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 정당한 비판은 신성모독이 되고, 헌법은 경전 아래 놓인다.


6. 우리는 이 망상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오늘날 한국의 극우 종교는 더 이상 신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려움, 증오, 보복의 정치적 형식을 종교의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종교는 해방의 신학이 아니라, 지배의 신학, 용서의 윤리가 아니라 심판의 윤리, 공동체의 사랑이 아니라 폭력적 배타성을 설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 폭력의 종교적 재연출이다. 브라질, 미국, 폴란드 등에서 보아왔던 현상이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 ‘신정파시즘’을 넘어서는 저항은 가능한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단지 정치적 위기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의미 해석의 위기, 윤리의 위기, 공동체 상상력의 위기에 처해 있다. 윤석열 정권은 그 공백을 극우 종교의 상징 자본으로 채웠고,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기꺼이 그 정권의 신학적 하청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신은 누구의 편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을 위한 도구인가?

  
   신은 권력자의 손에 들린 방패인가, 아니면 억눌린 자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시는 존재인가? 믿음이란 복종인가, 아니면 정의를 향한 실천인가? 정치는 단지 권력 쟁취의 기술인가, 아니면 공존을 위한 인간 공동체의 윤리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믿음의 회복이 아니라, 저항하는 신학, 해방을 향한 윤리, 시민 주권을 되살리는 철학적 상상력이다. 민주주의는 기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기도는 방향이 될 수 있지만, 실천 없는 기도는 곧 침묵이 되고, 침묵은 곧 공모가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축복하는 시대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신의 이름은 억압받는 자의 절규 속에서 울려야 하며, 권력을 향한 통치의 정당화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성스러운 전장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가치가 공존하며 타협하고, 때로는 충돌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인간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신의 뜻이 아니라 시민의 뜻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모든 비판을 무화시키는 시대, 우리는 다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윤리와 공동체성을 복원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의 진짜 기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집회의 함성이고, 탄압받는 진실을 붙드는 언론의 용기이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시민의 지성과 실천이다. 민주주의는 기도보다 더 절박한 실천을 요구하며, 그 실천은 두 손을 모아 하늘만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일어서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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