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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슬픔 없이 지나간 단 순간들을 기억하며

by 이번생 2025.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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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난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높은 아파트 위로
태양이 자신을 쥐어뜯듯 애쓰고 있다.
옆에 떠 있는 낮달은 어쩔 줄 몰라 한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부끄러움에 대해선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가끔, 정말 가끔
슬픔 없이 15초쯤 시간이 흐른다.
그 15초 동안 우리는 가능한 모든 핑계를 떠올린다.
거리들은 점점 휘어지고,
그림자가 드리운 길가엔 고요한 침묵이 쌓인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시간의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는다는 건 결국, 조금씩 비가 새는 일.
그런 존재들은 어쩌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건 아니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무더운 오후,
태양은 마지막 힘을 다해 빛을 짜내고
과거는 조용히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그저 꽃이 피고 지는 날들.
그 자체로 슬프다.
고양이는 꽃잎을 뜯어 먹고,
여자는 카모밀 차를 마신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나는 길 한가운데 멈춰 서 있다.
어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결국, 그는 넘어진다.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

혼란과 어지러움으로 가득한 머릿속,
그 안에서 방금
슬픔 없는 15초가 지나갔다.

이제, 어딘가로 발을 옮겨야 한다.
하지만 어딜 가든
그 끝엔 사라지는 길뿐이다.




슬픔 없이 지나간 단 순간들을 기억하며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없는 텅 빈 시간.
감정이 사라진 듯한 그 짧은 공백 속에서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심보선의 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바로 그 순간을 붙잡는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지나쳐버리는,
감정과 의미가 멎은 단 15초.
그 시간 속에는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삶은 종종 태양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빛나고 있어야 할 존재가,
오히려 우리를 타들어가게 만드는 때가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매일 가능한 모든 변명을 동원해
그 하루를 견딘다.


그 와중에도 아주 드물게
아무 감정 없이 지나가는 짧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지쳐 있거나, 혹은
모든 감정이 마모된 끝자락에서
그저 ‘존재하고’ 있는 상태.


시인은 말한다.
늙는다는 건, 비가 새기 시작하는 일이라고.
그 문장이 마음을 쿡 찌른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외로움이나, 과거, 혹은 후회 같은 것들이
조용히 스며들게 된다.


그렇게 삶은 흐른다.
과거는 추락하고, 미래도 그 뒤를 따르고,
우리는 ‘꽃의 나날’을 통과한다.
꽃은 피고, 지고, 사라진다.
예쁘고, 그래서 슬픈 시간.


누군가는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고,
누군가는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누구나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다시,
슬픔 없이 십오 초가 지난다.
그 고요한 틈 사이,
우리는 어딘가로 발을 옮기려 하지만
모든 길의 끝에는
언제나 사라짐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다.
무언가를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 충분한,
그런 15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때로는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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