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놀이를 찾아서 -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위해 웃으며, 또 무엇을 잃어가며 살아가는가.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여기에 아주 낯선 대답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다.”
우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약간의 당혹감을 느낍니다.
놀이? 그것은 아이들의 일 아닐까?
어른의 세계는 노동과 책임, 의무와 성취의 세계가 아니던가.
하지만 하위징아는 말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나 윤리가 아니라, 놀이에 있다. 삶의 근원에는 언제나, 자유롭고 자발적인 놀이의 힘이 숨어 있다.”
그는 노동과 놀이를 아주 간명하게 구분합니다.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행위,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하나로 결합된 행위.
건설 현장에서 모래를 나르는 사람을 떠올려봅시다.
그가 모래를 옮기는 이유는 임금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행위는 고단하고, 그 고단함은 임금을 받는 순간에만 잠시 보상됩니다.
모래 나르기는 수단이고, 돈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노동입니다.
즐거움은 미래로 미루어지고, 현재는 견디는 시간으로 남습니다.
이제 놀이터의 한쪽을 봅시다.
아이들이 모래를 만지고, 성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며 깔깔 웃습니다.
그들에게 모래는 돈이 아닙니다.
그저 손끝의 감촉, 모양의 변화,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수단과 목적이 하나인 세계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놀이입니다.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망각 속에서, 현재는 가장 충만해집니다.
하위징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하는 행동이 수단이자 목적일 때, 인간은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산다.”
그 말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지금은 어떤 시간입니까?
즐거움으로 충만한 현재입니까,
아니면 무언가를 위해 소비되고 견뎌야 하는 현재입니까?
우리는 종종, 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를 희생합니다.
그 결과, ‘지금’이라는 시간은 늘 피로에 짓눌리고,
행복은 ‘언젠가’로 미뤄집니다.
그러나 놀이는 다릅니다.
놀이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놀이 안에서 시간은 목적을 잃고, 존재는 완전해집니다.
하위징아는 말합니다.
“놀이는 명령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자발적 행위가 아닐 때, 그것은 단지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를 잃은, 노동의 또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등산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한걸음 한걸음이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즐거움을 직원들과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전 직원이 함께 산에 오르도록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산을 오르던 직원들의 표정은 사장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등산은 자유가 아닌 의무, 놀이가 아닌 명령이었습니다.
정상은 사장의 눈치가 닿는 자리였고, 발걸음은 피로로 무거웠습니다.
의도는 선했지만, 자유가 사라진 순간, 놀이는 노동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이 지점에서 인간의 창조성의 비밀을 밝혀냅니다.
노동이 아니라 놀이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집중력과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
즐거움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기꺼이 쏟아붓습니다.
위대한 발견과 혁신은 ‘열심히 일한 결과’가 아니라, ‘즐겁게 몰입한 순간’에서 탄생했습니다.
창조는 의무의 자식이 아니라, 놀이의 자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적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나의 적성은 무엇인가?
아이의 적성은 어디에 있을까?
하위징아의 시선으로 본다면, 적성이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놀이의 상태에 얼마나 가까운가의 문제입니다.
시간을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적성입니다.
자신이나 아이의 적성을 알고 싶다면, 관찰하세요.
명령하지 말고, 시키지 말고,
그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지 바라보세요.
거기, 놀이가 있고, 그 안에 적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버리고 세상의 평판과 경제적 이득을 좇습니다.
그들은 비범해질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평범한 길을 택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하위징아는 말합니다.
“놀이는 언제든 연기될 수도, 중지될 수도 있다.”
즉, 놀이는 우리 안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노동 속에서도 놀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로 전환시키는 순간,
삶은 다시 빛을 얻습니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 아닙니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이며, 존재의 가장 자유로운 표현입니다.
우리가 놀이를 잃는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잃는 일입니다.
아이 때의 놀이를 기억하시나요?
그 무심한 웃음, 시간조차 잊게 하던 몰입의 순간.
그때의 기쁨이야말로 삶의 근원적 리듬이었습니다.
그 리듬을 되찾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을 되찾는 일입니다.
하위징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삶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놀이를 잃지 말라.”
놀이 속에서만, 인간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놀이 속에서만, 지금 이 순간은 목적이 되고, 삶은 찬란한 현재가 됩니다.
노동의 세상 속에서도, 놀이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 이제 다시 물어야 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노동입니까, 아니면 놀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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