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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기

철학이 해야 할 일

by 이번생 2025.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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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해야 할 일

가끔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철학자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교사는 지식을 가르치며,
법조인은 정의를 세웁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저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이 질문을 자주 떠올립니다.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제가 그들에게 철학을 ‘가르친다’기보다
함께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대학에서 처음 강의를 맡았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철학을 어떻게 살아 있는 언어로 전할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철학은 교과서 속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요.
책에 적힌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상을 통해 ‘지금 이곳’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태도입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철학은 결국 뭘 하는 학문인가요?”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학은 잣대를 재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수많은 잣대로 살아갑니다.
법, 도덕, 상식, 전통, 정의 —
모두가 옳다고 믿는 기준들입니다.
그런데 그 잣대는 정말 ‘바른 잣대’일까요?


철학은 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묻기보다
‘그 옳음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묻는 일.
그것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철학은 잣대 없이 잣대를 재는 일입니다.
다른 기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과 양심으로 그 기준이 타당한지를 살피는 일이지요.
그래서 철학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 인간의 성숙이 있습니다.


법률가는 말합니다.
“법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는 법을 알아야 한다.”


법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법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때,
철학은 그 뒤에서 묻습니다.
“그 법은 사람을 위한 법인가?”
“그 법은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가?”


철학은 법을 다루지만, 법보다 성숙을 목표로 합니다.
법은 질서를 유지하지만,
철학은 인간의 내면을 성장시킵니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려 하지만,
정의는 늘 모호하고 변화무쌍합니다.
만약 정의가 법과 완전히 같았다면,
법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의란 이렇습니다.
“사람이 저러면 안 되지 않나?”
“그건 좀 부끄럽지 않나?”
이런 인간적인 감각 말이지요.


철학은 바로 이 감각을 가꾸는 학문입니다.
그 감각이 사라질 때,
세상은 합법이지만 부당한 일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철학은 그런 부당함을 알아채는 마음의 감각 기관,
즉 인간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합니다.


대학 강의실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수님, 철학은 답이 없어요.”


그럴 때 저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아요. 철학은 답을 주지 않아요. 대신, 더 나은 질문을 줍니다.”


철학은 세상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정의 위험을 경계합니다.
모두가 “그게 맞다”고 외칠 때, 철학은 묻습니다.
“정말 맞을까요?”

모두가 “그건 틀렸어”라고 말할 때, 철학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왜 틀렸을까요?”


철학은 확신을 흔들어 의심을 낳고,
그 의심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갑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빠릅니다.
생각보다 판단이 앞서고,
질문보다 결론이 먼저 나옵니다.
하지만 철학은 다르게 움직입니다.
철학은 멈추는 법을 가르칩니다.
잠시 서서 생각하게 만들고,
‘나는 왜 이렇게 믿는가?’를 돌아보게 하지요.


철학은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납니다.


저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철학은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는 일이다.”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은 진리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열린 물음의 태도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 물음이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갑니다.


철학은 완벽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철학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법이나 규칙보다 앞서 있는,
내면의 정의감과 양심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잣대를 바로 세우고,
그 잣대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묻는 일.
그리고 그 물음 속에서 우리가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일.


그것이 철학이, 그리고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철학은 옳다고 믿는 그 잣대를 다시 묻는 일입니다.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우리가 세상을 재는 눈금이 바른지를 먼저 살펴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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